꿈
writer.ㅎㅈㄱㅅ
꿈을 꾸었다.
꿈의 배경은 짙은 남색의 물감을 물속에 풀어서 서서히 옅어져 버린 듯한 푸른 밤하늘이었다.
작디작은 별들이 수놓아져 있는 그 하늘 아래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밝은 하늘빛의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보이는 거라곤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펼쳐지는 푸른 지평선뿐,
그 외에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그 넓은 들판에서 시선을 하늘로 옮기니 반짝이는 작은 별들이 푸르스름한 하늘에 빼곡히 박혀 있었다.
마치 한 마을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처럼 별들은 밀집되어서 하늘을 더 밝게 빛내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다른 별들보다 더 밝게 반짝이더니 지평선 쪽으로 재빠르게 곤두박질쳐버렸다.
나는 시선을 좇아 떨어진 쪽을 바라보았다. 별이 떨어진 곳에서 푸른빛이 환하게 번지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나는 천천히 별이 떨어진 곳으로 발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부드러운 흙과 다리를 스치며 간질이는 풀들이 느껴졌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별이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별 대신 커다란 알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크기는 농구공만 한 크기에 색은 전체적으로 옅은 하늘색이고 작고 짙은 파란 점들이 점점이 박혀있었다.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알을 들어보니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가만히 알을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알을 쓰다듬었더니 알 속에서 작은 생명체가 크게 움직였다.
그것이 신기해서 두어 번 더 쓰다듬었더니 마치 맞추기라도 하는 듯이 두어 번 더 움직였다.
알 속의 움직임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마치 내가 잉태했던 생명을 마주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무언가 나를 쳐다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보았더니 그곳에 무언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 먼 곳에서 보는 것도 아닌데 정확히 무엇이 그곳에 있는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지만 결국 무엇이 나를 쳐다보는지 알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발걸음을 옮기니 갑자기 온 주변이 까맣게 변해버렸다.
***
컴컴한 새벽녘에 눈을 뜬 C는 조용히 눈을 여러 번 깜빡인다.
분명 꿈을 꾸긴 꾸었는데 무엇을 꿨는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C는 미간을 찌푸리고 천장만 쳐다보다가 상체를 일으키고 침대 옆에 있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살이 에일 정도의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정신이 번쩍 들은 C는 다시 창문을 닫고 침대 옆에 있는 전자시계를 쳐다보았다.
기괴한 초록빛을 내뿜는 전자시계가 지금 시각은 오전 5시 3분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C는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긁적이며 침대에서 나와 욕실로 향했다.
끼익, 끼익, 고요한 복도에서 마룻바닥의 작은 비명들이 울려 퍼졌다.
ㅡ
C의 생활은 평범하다 못해 지루하기 짝이 없다. 대한민국의 여느 고등학생의 하루와 똑같다.
5시,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씻고, 교복을 입고 나와서 학교에 간다.
0교시를 시작해서 3교시까지 수업을 듣고, 점심시간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고,
다시 4교시부터 7교시까지 수업을 받는다. 학교가 끝나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학원으로 간다.
학원에서 연강으로 수업을 듣고, 짧은 저녁 시간에 간단히 허기를 채울만한 것들을 입안에 쑤셔 넣고 다시 10시까지 수업을 듣는다.
학원 수업이 끝나면 학원에서 나와 다시 학교로 향한다.
다시 등교해서 야자실로 들어가 12시까지 공부를 한다.
이미 뇌는 포화상태이기 때문에 머릿속에는 쥐뿔도 들어오지 않지만 일단 붙잡고 있는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눈으로 글자를 읽으며 12시까지 앉아있는다.
퇴실시간이 다 되어 야쟈실에서 나오면 곧바로 24시간 카페로 간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시키고 이젠 뵈이지도 않는 책을 펼친다.
쓸데없이 시간을 두어 시간 더 보내고서야 C는 카페에서 일어선다. 느릿느릿, 발을 질질 끌며 집으로 온다.
집에 들어오면 오전 2시 30분. 지친 몸을 끌고 방으로 올라간다.
불을 켜니 C를 반기는 것은 가구가 별로 없는 휑한 방이었다. 커다란 침대 하나, 책장 하나,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책장 안에는 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모두 문제집이다.
수학의 정석 上, 수학의 정석 下, 성문 영문 독해, 성문 영문 문법, EBS 영문 독해, 인터넷 수능….
C는 가만히 자신의 방을 둘러보고는 문가 바닥에 가방을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곧바로 욕실로 가서 오늘 하루 동안 받은 피곤함을 씻어버렸다.
짧은 시간 안에 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말리지 않은 채 바로 침대 위에 벌렁 누워버렸다.
C는 자신의 생활을 평범한지, 지루한지, 답답한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한민국 모든 고등학생이 저와 같이 피곤하고 반복적일 것이고, 미래는 밝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겠지만 어쨌든 C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갑자기 승승장구하면서 부르주아의 삶을 살든,
집이 길바닥에 나앉아서 거렁뱅이 삶을 살든, 그 끝은 죽음이었다. C는 눈을 감았다.
***
따뜻한 온기가 품에서 느껴진다. 아래로 시선을 내리니 품 안에 커다란 알이 있었다.
알은 곧 부화하려는 건지 크게 움직였고 미세하게 금이 가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지평선을 쳐다봤다. 바람이 불어와 하늘빛 초원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저 멀리 무언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이지 않아서 눈을 찌푸리고 쳐다보는데 그것은 서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덕분에 쉽게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영롱한 눈망울에 쫑긋한 귀, 비교적 길죽한 목 길이, 얇지만 단단해 보이는 다리.
그리고 윤기나는 푸르스름한 털. 나는 짐승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짐승 또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커다란 눈 속에는 커다란 알을 품에 안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짐승의 눈 속의 사람의 얼굴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짐승은 한 발짝, 한 발짝 바로 내 코앞까지 왔다. 짐승의 눈은 나를 담아내는 걸로는 성에 안 차는지 곧 집어삼키려 했다.
나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짐승은 겁 없이 계속 다가왔다.
짐승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점점 크기가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품 안의 알을 꼬옥 끌어안은 채 뒷걸음질을 계속 치다가 뒤에 무언가가 나를 더는 못 가게 막았다.
아뿔싸, 하고 뒤를 돌아보니 단단하게 묶여있는 울타리가 있었다.
고개를 다시 돌려보자 눈앞에는 처음 봤을 때와는 확연히 차이가 느껴질 만큼 커다랗게 자라난 짐승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짐승의 눈에는 이제 공포로 가득 찬 표정의 사람이 담겨 있었다.
짐승은 고개를 숙여 나의 얼굴 앞으로 자신의 머리를 들이밀었다. 두 개의 까맣고 맑고 투명한 눈이 나를 보았다.
짐승의 콧김이 나의 앞머리를 헝클어놨고 품 안의 알이 거세게 움직이며 쩌적 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약 2분간 나를 쳐다보던 짐승은 커다란 입을 벌리고 까슬까슬하고 축축한 혀로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내 얼굴을 핥아올렸다.
끈적거리고 냄새나는 짐승의 침이 내 얼굴을 범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짐승은 누런 이를 드러내고 내 머리를 씹어 삼켜 버렸다.
***
C는 눈을 크게 뜨고 벌떡 일어났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전자시계를 쳐다보았다.
오전 4시 38분. C는 마른세수를 했다. 까드득, 까드득, 아직까지도 머리가 씹히는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머릿속까지 소름이 끼쳤다. C는 벅벅 소리를 내며 시뻘게지도록 팔을 긁었다.
고개를 거세게 저으고는 다시 누웠다.
침대 시트가 땀으로 인해 축축한 게 느껴졌다. C는 눈을 꼭 감았다.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다시 침대에서 일어난 C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다시 긁고는 벌떡 일어나서 욕실로 향했다.
ㅡ
동아리 시간. C가 속해있는 동아리는 이름만 거창한 ‘시 창작부’ 다. 실제로는 시에 관련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학생들을 위한 4시간짜리 자습시간일 뿐.
C는 항상 앉던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열고, 문제집을 꺼낸다. 필기구를 꺼내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다른 학생들도 C와 같은 행동을 했다. 문제집을 풀고, 풀고, 풀고. 한 권의 문제집이 끝나면 또 다른 문제집을 꺼내서
다시 처음부터 문제를 푼다. 기계처럼 문제를 푼다. 끝도 없이, 계속 문제만 푼다.
그때 교실 문이 열리고 교사가 들어왔다. 교사는 교탁으로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더니 교무실에 도난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흥분된 목소리로 교사는 말을 이어갔다. 없어진 물건은 사회담당 교사의 지갑. 교실 안은 곧바로 소란스러웠다.
C는 별 감정이 없는 눈으로 교사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어차피 훔친 사람은 자신이 아니므로 더 이상 관심을 보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한 학생이 일어나서 조용히 교사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교사에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교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어가서 공부하라고 학생의 어깨를 도닥였다.
교사는 꼭 자수하라고 말하고는 교실을 떠났다.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다.
C는 이어폰을 꺼내서 귀를 막았다. Royal Blood의 Figure It Out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ㅡ
30분간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C는 자신은 전혀 아니라고 말한다.
교사는 C의 말을 믿지 않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윽박지른다.
이미 목격자까지 나왔다며 발뺌해도 소용없다고 말한다.
C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뭐라 대답할 수도 없었다. 훔친 기억도 없는데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훔친 거란 말인가.
교사는 빨리 내놓으라고 말한다. C는 교사에게 자신이 훔쳤다고 말한 이가 누구인지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사는 그건 너와 상관이 없으니 어서 지갑이나 내놓으라고 한다. C는 답답하기만 했다.
고등학교 입학 이래 교무실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훔쳐간다는 건지.
교사는 계속 이렇게 뻐팅기면 몸을 뒤져볼 거라고 협박하는 말투로 말했다.
C는 꿀릴 것 없다며 어서 살펴보라고 몸을 내주었다. 교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C에게 다가와 몸을 수색했다.
C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양팔을 올렸다. 어제처럼 평범하고 지루하고 피곤한 하루를 보내야 맞는 건데 이게 갑자기 웬 날벼락인가.
교사는 그만 팔 내리라고 말했다. C는 얼른 판사님께 무죄 선고를 받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교사는 보란 듯이 C의 뒷주머니에서 빛바랜 고동색의 지갑을 꺼내서 흔들어 보였다.
C는 입을 벙긋거렸다. 믿을 수 없었다. 저게 왜 자신의 뒷주머니에서 나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C는 자신은 절대 아니고 저게 왜 자기한테서 나왔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다.
교사는 그저 C의 눈을 쳐다볼 뿐이었다.
***
하늘빛 초원이 바람에 의해 물결치고 있었다. 바람은 성이 난 것처럼 점점 거세졌다.
하늘은 구름 한 점도 없었고 별들은 그저 반짝이기만 했다. 나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별 하나가 바닥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별의 희생으로 주변이 푸른빛으로 환해졌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나는 별이 떨어진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이미 무언가 그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눈으로 움직이는 것을 좇으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사람으로 추정되는 것이 먼저 그곳에 도착했다.
나는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갔고 그것은 확실히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풀숲으로 두 팔을 뻗어서 커다랗고 푸르스름한 알을 꺼냈다.
알이 굉장히 낯익고 익숙한 느낌이었다. 저 알을 안아보고 온기를 느껴봤던 기억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저 사람의 생김새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갔다. 그때, 그 사람이 고개를 들어 내 쪽을 쳐다봤다. 그 사람은,
ㅡ
[ 몰아! 왼쪽 덫 쪽으로 유인해! ]
컹컹거리는 개들의 사나운 소리와 지시하는 사냥꾼들의 목소리가 숲 속을 가로질러 퍼졌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잡히지 않도록, 온 힘을 쥐어짜 내서,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계속 달렸다.
그러나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뒤쪽에서는 쫓아오는 개들과 간격이 좁혀지는지 점점 개들의 짖는 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잡히면 안된다. 잡힐 수 없다. 털이란 모든 털이 쭈뼛 섰다.
정신없이 내달리면서 개들에게 혼란을 줘서 좀 더 간격을 넓히기 위해 나는 오른쪽으로, 또는 왼쪽으로 계속 지그재그 모양으로 뛰었다.
초반에는 개들이 못 쫓아와서 개들의 소리가 작아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따돌린 건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뒤를 쳐다봤다.
그러나 저 멀리서 개들이 다시 뛰어오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다시 뛰었다.
이젠 숨을 쉬고 있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를 다그치며 뛰어가는데 눈앞에 동굴이 보였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하지만, 뒤에서 개들의 우렁찬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나는 다급하게 동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
항상 남이 커다란 도마 위에 올라가서 수십, 수백 개의 칼로 난도질 당하는 것만 보았다.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에 그 정도의 대접을 받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저도 모르는 사이에 도마 위로 올라가서 수십, 수백 개의 칼들이 일제히 자신을 쳐다본다면,
날이 선 그 칼들이 날아와 온몸을 너덜너덜하게, 조각조각 큐브처럼 나누어 준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
ㅡ
'소문'이라는 것은 굉장히 빠르다. 옛말에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하듯이, 소문은 단 이틀 만에 전교에 퍼졌다.
떠벌리기 좋아하는 이들이 한몫하기도 했었다. 마치 기밀을 알아낸 것처럼 뜸을 들이며,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말해서 더 빠르게 퍼졌다. 내용은 '지갑을 훔친 도둑 새끼가 C'라는 것.
솜털같이 입이 가벼운 이들 덕분에 학생들은 C의 존재와 함께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있었다.
도를 지나친 인간들은 C가 지나갈 때 저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며 자신의 주변인들에게 알려주었다.
졸지에 C는 교내의 유명인이 되었다. C는 변명하지 않았다. C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그들이 뭐라고 자신에 대해서 떠들든 상관하지 않았다. C는 결백했다. 자신은 결백하다고,
자신을 모함하고 있는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C의 말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럴 마음도 없었다. 이미 그들에게 C는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지갑을 훔친 도둑 새끼라고 낙인찍혔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힐끔거리며 C를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어 떠들기 시작했다.
C의 친구들도 C를 피했다. C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럴 수 있다고,
자신도 자신의 친구가 이런 일을 경험했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ㅡ무엇이 C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무엇 때문에 평범하다 못해 지루하고 피곤한 C의 일상을 이렇게 파괴적인 이벤트로 망쳐버렸는가.
C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
주변이 온통 까맣다. 눈을 여러 번 깜빡이자 눈이 어둠에 적응하고 초점을 정확히 맞추었다.
똑똑똑, 작은 물방울 소리가 규칙적으로 여러 번 떨어졌다. 천장에는 삐죽삐죽한 기둥들이 많았다.
동굴인 걸 눈치챈 나는 여기 왜 있는지 잠깐 생각했다. 똑똑똑, 똑똑똑. 물방울 소리만 들릴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입구로 추정되는 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움직였다.
똑똑똑. 똑똑똑.
자박자박. 자박자박.
동굴 안은 물방울 소리와 내 발걸음 소리가 섞였다. 섬찟한 느낌이 들었지만 계속 빛 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10분 정도 걸어가니 동굴 밖이 나왔다. 동굴 밖에는 남색의 풀들과 나무로 가득했다. 개중에는 까만색의 풀도 있었다.
나는 몇 발자국 더 나와서 풀숲을 바라보았다. 그때 희미하게 그르렁대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름이 쫙 돋았다. 곧바로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나는 다시 동굴 쪽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 했다.
사냥개 한 마리가 튀어나와서 내 발목을 물어뜯었다. 이를 세워서 살점 깊숙이 이를 박았다. 살점이 찢겨지는것이 느껴졌다.
고통스러워서 비명을 질렀다. 남은 사냥개 한 마리가 나와서 목을 물어뜯었다. 숨통이 죄인다.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면서 뒤를 돌아보니 사냥꾼이 치아를 다 들어내며 웃고 있었다.
점점 눈앞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희미하게 사냥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가만, 저거 머리는 내가 가져가야겠군. ]
사냥꾼은 저벅저벅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도끼를 꺼내 들었다.
이빨이 빠져있는지 날이 잔뜩 서있는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사냥꾼은 내 목을 물어뜯는 개의 이름을 불렀다.
개는 물고 있던 내 목을 놓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살기 위해, 게걸스럽게, 하나도 남김없이 마셔버릴 것 처럼 숨을 들이쉬었다.
부족했다. 턱없이 부족했다.
사냥꾼은
도끼를 높이
들어서
내
머리를
뚝.
ㅡ
사냥꾼은 노루의 두 귀를 잡아들어서 잘린 머리를 들었다.
목에서 피가 주르륵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개들은 혓바닥을 내밀고 헥헥 거리며 숨을 쉬었다.
사냥꾼은 이리저리 머리를 살펴보고는 자신의 충견들ㅡ특히 목을 물어뜯어 너덜너덜하게 만든 달마시안ㅡ에게 칭찬을 했다.
[ 잘했어, 칼. 아주 정확히 숨을 끊어놨군. ]
사냥꾼은 사냥개들의 머리를 두꺼운 손으로 툭툭 쓰다듬었다. 그리고 개들에게 머리를 가까이 보여주었다.
[ 너도 보거라. 눈이 매우 아름답지 않나? ]
개는 그저 헥헥 거리며 머리를 쳐다볼 뿐이다. 그리고 혀를 한번 날름하고는 다시 헥헥거렸다. 침이 흘러나오는 듯하다.
[ 털빛도 신기하게 푸른색인데 눈 안에 구름이 담겨있는 것 처럼 보이는군.
밤하늘의 별도 담겨있는 듯하네. 잡길 정말 잘했어. 팔면 큰 값을 하겠군. ]
사냥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이 잡은 노루의 머리를 이모저모 뜯어보았다. 그때 다른 사냥개가 머리를 확 물었다.
[ 제임스!! 무슨 짓이야!! ]
사냥꾼은 깜짝 놀라서 잡고 있던 노루의 귀를 놓쳐버렸다. 사냥개는 떨어진 머리를 사납게 물어서 흔들어댔다. 곧바로 다른 사냥개가 같이 물어뜯었다. 그리고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 그만둬!! 이 똥개들이!! ]
사냥꾼은 퍽퍽 거리면서 개들을 장총의 뒷부분을 개들을 내려쳤다.
[ 간만에 값어치 되는 것을 잡았더니 이것들이… ]
사냥꾼이 미간이 파일만큼 인상을 찡그리며 총구로 너덜너덜해진 머리를 파헤쳤다. 피가 흘러내려 땅바닥을 흥건히 적셔놨다.
눈알은 하나가 터진 채로 땅바닥에 굴러다녔다. 사냥꾼이 입맛을 다셨다.
간만에 한 건 해서 거하게 한 끼 할 수 있었건만…사냥꾼은 눈치를 보며 낑낑거리고 있는 사냥개들을 버러지 보듯이 보면서
머리를 왼쪽 발로 툭 쳐서 개들 쪽으로 보냈다.
[ 자, 다 뜯어 먹어라. 어이구, 이 똥개들… ]
개들은 사냥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시 달려들었다. 개들의 입 주변에는 피로 지저분해졌다.
사냥꾼은 머리가 잘린 노루의 몸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칼을 꺼내 들어서 노루의 가죽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
교내에는 그저께 소문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서 교사들 귀에도 들려왔다.
C는 듣지 못했다. 소문의 주인공이 C이기 때문이다.
자취방에서 C가 머리가 잘린 채 살해되어 발견되었다. 왜 C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도 없었다.
창문도 굳게 닫혀 있었고, 문을 딴 흔적도 없었다.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누가 C를 죽인 건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C의 시체 주변에는 피가 흥건했는데 특히 머리통이 엉망진창이었다.
눈 한쪽이 방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고 특히 얼굴 전체에 구멍들이 숭숭 뚫려있었다.
경찰 중 한 명이 인상을 찌푸리며 C의 시체를 천으로 덮었다.
경찰들은 차례차례 건물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간밤에 소리도 나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들은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열심히 사건을 조사해볼 생각은 없었다.
그저 미해결 사건으로 처리해 파일을 작성해서 윗대가리들한테 넘겨버리고 얼른 퇴근해서 술 한잔 걸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경찰들은 대충대충 사건을 진행하고 C의 시체를 옮겼다.
C의 시체가 치워진 자리에 조각난 알 껍데기 파편이 조그맣게 널브러져 있었다.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