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있 던 자리
writer.늘부
눈가에 닿는 햇살이 간지러웠다.
둥글둥글하게 뭉쳐선 볼을 따라 또르르 굴러내려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신이 든 지는 조금 되었지만 뒷목을 쓰다듬는 보드라운 풀의 감촉이 좋아 그대로 누워 있었다.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풀잎을 만지작거린 지 몇 분쯤 되었을까,
자신이 살던 곳에서는 이런 풀밭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소녀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만 없다면 무슨 판타지 영화 촬영장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싱그러운 풍경이 눈 앞 가득히 펼쳐졌다.
시선을 조금 당겨 자신을 내려다보면, 옷은 어제 입고 자던 목 늘어난 티셔츠와 유치한 무늬의 수면바지 차림 그대로였고,
하다못해 이불까지도 평소 버릇대로 품 안에 꾸깃꾸깃 뭉쳐져 있었다.
단지 자신이 잠들어 있던 침대가 멋진 언덕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난 분명 풀밭색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는데. 그새 이불에서 풀이 자랐나? 소녀는 실없는 소리를 하며 킥킥 웃었다.
바람이 함께 즐거워하듯 웃음소리의 끝에서 수풀을 흔들고 지나갔다.
자고 일어나니 처음 보는 장소에 떨어져 있다니, 분명 엄청나게 걱정해야 할 상황인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위기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들뜬 것이 엄마 몰래 소풍 나온 어린애라도 된 기분이었다.
잠들었던 때 그대로 풀어헤친 머리칼은 지금 제멋대로 날리고 있지만,
그 시원한 느낌에 귀찮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좋아져 머리를 묶으려던 손을 그대로 내렸다.
내가 살던 도시에는 이렇게 맑은 바람이 불지 않
멈칫. 이야기는 그곳에서 툭 끊겼다. 소녀는 글을 써내려가던 연필을 잠시 놓았다.
눈가를 계속 찔러대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워서였다.
더 이상 받쳐주는 것이 없는 연필이 굴러가다 책상 아래로 떨어졌다.
소녀는 그 모습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보고 있었다.
너무 오래 엎드려 있어서였을까, 목 뒤가 뻐근하니 쑤셔왔다. 시선을 들면 커튼 틈새로 세로로 길게 조각난 하늘이 보였다.
목 늘어난 티셔츠에 수면바지로 이루어진 후줄근한 차림에 걸맞는 답답한 방 안이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줄 바람이 저 창백하다 못해 누리끼리한 하늘에서 불어올 리는 없었다.
소녀는 언제까지고 소녀였다. 소녀이고 싶었기에 소녀였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소녀이고 싶었다.
그렇기에 열 아홉, 적지 않은 나이에도 몽상가는 여전히 소녀였다.
둥글둥글하게 뭉쳐진 감정이 몽상가의 볼을 따라 또르르 흘러내리며 햇살이 있을 자리를 대신 채워갔다.

[햇살도 둥글둥글하게 뭉치는 맑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