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writer,노엔
‘부질없는 짓이다. 그만두거라!’
머릿속을 울리는 싸늘한 목소리에 적윤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주위에 옅게 내려앉은 냉기로 인해 몸은 한층 식어있었으나 그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반사적으로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두어 번 근방을 살핀 뒤에야 긴장감이 감돌던 그의 눈에는 약간의 안도가 스며들었다.
고요했다. 그곳은.
“…누이, 이제 그만 가오.”
혹여 고뿔에나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어 덮어둔 옷가지들 사이로 비죽 내보인 새하얀 손이 움칠거렸다.
그러마라는 대답은 없었으나 그 작은 행동만으로도 적윤은 마치 승낙을 얻어낸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마냥 조심스럽기만 한 커다란 손이 옷가지들을 걷어내기 시작함과 동시에 핏기없는 얼굴은
아직 피곤함이 서려 있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마주칠 리 없는 눈이 마치 우연 같게도 서로를 응시하자 적윤은 살짝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누이, 윤이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몸을 가볍게 일으켜 옷가지들을 꼼꼼히 덮어준 뒤 등에 업었다.
단단한 팔이 몸뚱어리를 받쳐 흔들리지 않게 고정하자,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만 같았던 발은 이내 앞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나아가는 발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고민도 담겨있지 않았다.
차가운 새벽 공기, 정적만이 남은 산기슭,
들릴 듯 말듯 귓가를 간지럽히는 가느다란 숨소리….
“아직 해가 뜨질 않았는데 춥진 않으오?”
“…….”
“오늘은 왠지 마음에 드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그러하오.”
“…….”
대답하는 이는 없으나 적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정함이 한껏 배인 목소리로 계속해서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묻고 있었다.
그저 등으로 전해오는 온기만이 그의 중얼거림에 대신 응할 뿐이었다. 아, 물론 그것이면 어떠하리.
터벅터벅. 땅과 가볍게 스치는 느린 발걸음 소리가 주위를 메웠다.
한 명의 걸음이 두 개의 온기를 가득 끌어안고 가는 듯한, 그런 소리였다.
눈을 감았다.
떨리는 눈꺼풀은 금세 시야를 가렸고,
‘어찌 그만두어라 하십니까!!’
그는 울부짖고 있었다.
‘도련님, 송구하오나 아씨께옵선 이미 급격히 병이 진행되어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지금처럼 앞이 보이지 않으심은 물론이고 앞으로 남은 시간 또한….’
괴로움과 슬픔에 뒤덮여 흉하게 일그러진 아버님의 얼굴이 보였다.
두 손을 움켜쥐고 그저 눈물만 흘리시는 어머님.
방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아무 말 없이 초점 없는 눈을 가만히 깜박이는 누이의 모습.
벗어나야 했다.
그깟 이름 모를 병 하나로 별당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니었기에.
별당에 드나들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셨던 아버님의 말씀을 어기고 어김없이 새벽바람을 맞으며 누이를 찾아간 그 날,
조용하지만 옅은 한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꽃이 보고 싶구나.’
적윤은 눈을 떴다.
편지 한 장만을 달랑 남겨둔 채 누이를 업고 밖으로 나온 지도 열닷새.
간절하게 누이의 이름을 읊조리며 내민 그의 손에는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점철된 눈물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 손을, 누이는 말없이 받아들였을 뿐이다.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살짝 서늘한 기운이 지나갔다.
등 뒤에서 조그마한 기침 소리가 들려오자 당황한 그는 몸을 조금 더 밀착시키며
어떻게든 가진 온기를 더 나눠주고자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에 상응하듯 더 이상의 기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누이, 오늘은 날이 따스하오. 이제 점점 더 따뜻해지려나 보오.”
곧 꽃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애써 활기차게 말하는 적윤의 목소리에는 바람이 담겨있었다.
누구보다 간절하고 간절한 염원. 긍정의 대답이 없어도 분명 그리될 것이라 생각하는 그의 올곧은 마음.
부디 잠들지 말아 달라는 듯,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는 다정한 목소리가 울리고 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누이의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온 듯했다.
‘윤아-….’ 하고 부르는 중얼거림과,
그리고,
하이얀 손이 적윤의 팔에 턱- 하고 걸쳐졌다.
힘없이.
쉴새 없이 재잘대던 적윤의 입이 멈췄다. 그는 말이 없었다. 아니, 대답하지 않았다.
그토록 간절히 듣길 원했던 누이의 부름에도 그저 묵묵히, 입술을 깨물며.
마치 듣지 못했다는 것 마냥 앞을 향해 나아갔다.
해가 천천히 산 너머로 뜨기 시작했다.
그때 저 멀리 무언가가, 그의 눈에 담겼다.
발걸음이 멈췄다.
“…누이…….”
목소리가 축축히 젖어들었다.
“벚나무에 꽃이 피었소….
…내가 뭐라 했소. 오늘은 볼 수 있을 거라……. 분명….”
더 이상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아른아른 피어나는 꽃은 간절한 이 내 마음 알 리 만무하리.』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